21화 – 아이는 자라지만 아빠는 괜찮은가 – 육아 번아웃의 그림자

아이는 자라지만 아빠는 괜찮은가 – 육아 번아웃의 그림자

처음 육아를 시작했을 땐 모든 게 낯설고 버거웠다.

아이를 안는 것도 서툴렀고, 기저귀 하나 갈 때마다 식은땀이 났다.

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점점 익숙한 아빠가 되어갔다.

아이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배고픈지, 졸린지 알 수 있었고, 하루 루틴도 자연스럽게 흘렀다.

나는 이제 잘하고 있는 아빠가 되어 있었다.

하지만… 이상했다. 더 잘하고 있는데,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.

아이의 성장은 기뻤지만, 그 순간의 감정은 ‘기쁨’이라기보단 무미건조한 일상 보고서처럼 느껴졌다.

🧱 반복되는 하루 – 성취감 없는 전진

하루하루는 바쁘다. 아침엔 이유식을 만들고, 낮엔 아이와 놀고, 밤엔 재우고 치운다.

모든 일을 해냈지만, 해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.

하루가 끝날 때마다 느껴지는 건 ‘오늘도 버텼다’는 피로감뿐.

생산성 없는 루틴 속에서 나는 점점 나 자신과 멀어지고 있었다.

🌪️ 웃고 있지만 텅 빈 마음 – 무기력의 시작

아이를 보며 웃는다. 하지만 그 웃음은 진심보다는 반사적인 표정일 때가 많아졌다.

아이의 반응 하나하나에 감동하던 감정은 어느새 무뎌졌고, 그 자리에 남은 건 ‘해야 하니까 하는 육아’였다.

예전엔 아이와 눈을 마주치면 벅차올랐는데, 요즘은 그 눈빛조차 내 마음속에 파동을 일으키지 않는다.

그저 조용히 바라보다 다시 다음 할 일을 찾는다.

😞 아빠도 탈진할 수 있다 – 이것이 ‘육아 번아웃’

회사에서만 번아웃이 오는 줄 알았다. 하지만 육아도 마찬가지였다.

눈을 떴을 때부터 온종일 타인의 요구에 반응해야 하는 삶.

먹는 것도, 씻는 것도, 자는 것도 내 타이밍이 아닌 아이 중심으로 돌아가는 하루.

이건 단순한 피로가 아니었다. 존재 자체가 닳아가는 느낌.

불현듯 드는 생각. “나는 사라지고, 아빠라는 기능만 남은 건 아닐까?”

🛑 이런 신호가 보인다면

내가 경험한 육아 번아웃의 증상은 이랬다:

• 아무 일 없어도 이유 없이 짜증이 난다
• 아이가 귀여워도 감정이 반응하지 않는다
• 쉬는 날이 더 두렵다 (아이와 종일 있어야 하니까)
• 잠을 자도 피로가 누적되어만 간다
• 사소한 말에도 배우자에게 신경질이 나온다
• “나만 이렇게 힘든가?”라는 생각에 자주 빠진다

그때 깨달았다. 나는 단순히 피곤한 게 아니라, 무너지고 있었다.

💬 “너는 그래도…” – 비교의 말이 남긴 상처

가끔 친구나 지인에게 내 상황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.

그러면 돌아오는 말.

“그래도 넌 재택하잖아.” “그래도 애가 하나라 다행이지.” “그래도 네 와이프가 많이 도와주잖아.”

그 말들은 모두 내 고통을 작게 만들고, 내 감정을 숨기게 만들었다.

그래서 나는 결국 혼자 끙끙 앓았다.

🧠 ‘감정’에도 근육이 필요하다

육아 번아웃을 극복하려면 정신력보다 먼저 감정 회복 근육이 필요하다.

나는 이렇게 바꿔보기 시작했다:

• 내 기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
  “힘들다”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
• 하루 중 나만의 고정 시간 확보
  짧게라도, 방해받지 않는 15분
• 배우자와 감정 대화하기
  일과 보고가 아닌, 마음 나누기
• ‘잘해야 한다’는 강박 내려놓기
  80점짜리 육아도 충분하다

이 작은 변화들이 조금씩 내 감정의 색을 되찾게 해주었다.

🧍‍♂️ 아빠라는 ‘역할’ 너머에 있는 ‘나’

아이의 아빠라는 역할, 가족을 책임지는 존재라는 타이틀은 분명 자랑스럽다.

하지만 나는 여전히 혼자 있고 싶은 순간도 필요하고,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앉아 있고 싶은 사람이다.

그걸 부정하지 않아야 내가 더 건강한 아빠가 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.

🌱 마무리하며 – 번아웃을 마주한다는 것

아이는 자란다. 말도 늘고, 표정도 풍부해졌다.

하지만 그 옆의 나는 더 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마모되고 있었다.

이제는 그 ‘마모됨’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.

부족해도 괜찮다.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.

“나는 오늘도 버텼다.” 그 한 문장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.

육아는 끝없는 반복이지만, 그 안에서 나도 돌보고, 나를 존중하는 연습이 필요하다.

아빠도 괜찮지 않을 수 있다.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진짜 괜찮아지는 첫걸음일 수 있다.

▶ 다음 이야기: 22 – 아빠의 친구는 어디 있나요 – 육아 속 고립감